2001년 국비 등 61억원으로 준공·개관한 창의사에는 의병대장·영의정내암정인홍, 1536 등 122명(10명) 이를 선양하고 있다. 합천창의사 122명과 의령충익사 18명! 합천 부근의 충익사에는 충익곽 재유, 을 비롯한 윤택 박사제 정연 정종승 호자대 등 삼가의열 등 의령병 11명 등 18명만을 봉안하고 있다. 忘れ堂 郭再祐, 휘하로 임진왜, 때 공을 세웠다며 1605년(선조 38) 정)심대승(침대승, 2등), 봉사(봉사) 윤택(윤태, 3등) 5명이다. 능천내암 정인홍(, 1618년 영위정 임명) 휘하로 의병투쟁을 한 인물 중선무하라 종공 신록권을 받은 사람은 정인홍(정인), 충1, 충1 2등, 윤택(윤태), 전제(전후), 정상예(정첨), 하종해(河宗海), 3등 등 11명이다. 1597년 정유재와는 곽준(곽준), 조종도 등 함양황석산성에서 전사한 사람들은 한 명의 밝은 선무원 종공 신록권을 받지 못했다. 특히 임란사에 관한 중요한 사료인 남원의 조경남, 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 권1) 정인헌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공은 남의 터미널에 있었지만 사실은 일 상감사 김수(김무, )는 삼가·초계·성주·고령의 군대를 정인헌에게 맡겼다”고 증언하고 있다.
원장령(장령, 정4품) 내암 정인헌은 임란 발발 30일이 지나 정전병 수백명과 창군 수천명을 모군 후 창의(倡義)하고 20일 후에 1592년(선조 25))으로 임명된다. 이때 고령 및 거창의병장인 원랑(사석, 정 6품) 성암 김명(松菴金沔, 1541, 고령생)은 합천군수로 임명된다. 하지만 남은 외식자 정연(정삼, 1571)이 의병투쟁 중에 병에 걸려 사망하고 1593년(선조 26) 의병대장과 제용감정을 사직하기에 이르렀다. [의령군은 건물(사당) 이름도 곽재우 포도충익을 빌려 1978년 충익사로 세웠다. 그러나 합천은 당호, 집의 이름을 전국에 늘리고 있는 창의사로 2001년에 세웠다. 고민 없이 명명한 것이다. 의녕읍 충익사안에 1974년에 건립한 강히룡기공비 가운데 강언룡이 선무원 종공신에게 본훈훈되었다고 한 것은 틀렸다. 수정해야합니다. ] 합천창의사에게 봉안한 122명 중 정사인 실록과 난중잡록, 고대 리스트, 송암집, 학봉집 등 신뢰할 수 있는 문집에 이름만으로도 나오는 사람까지 맞춘다고 해도 임란 때 점차 활약한 자는 52명이 넘는다. 앞으로 더 연구하면 추가되는 개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거(팩트)가 없는데도 합천창의사에게 적지 않은 인물 60여명이 봉안되고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들어가야 할까. 확실한 것은 선무원 종공신녹권을 받은 정인헌 등 11명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노훔 등 7명만 창의사에게 봉안(배향)해 심양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창의사는 합천군 창의사관리·운영조례( 제정) 제4조에 따라 “임란창의장의 위업선양홍보 및 교육에 관한 사항”을 합천군으로부터 위탁받아 실시하는 공공기관이다. 그런데 창의장은 안녕 의병 창의에도 참여하지 않은 자를 창의사에게 봉안하고 매년 기념하는 윤을 올리고 존경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자 예산 낭비일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실제로 임란 때 왜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투쟁한 분들의 자존심을 밟은 실례다.
올바른 역사를 확립한다는 당위성뿐만 아니라 창의사는 세금(61억원)으로 건립해 합천군 창의사 관리·운영조례에 의해 설립된 공공기관이 아닌가. *창의장(倡義將, 의병대장)은 내암 정인헌 1명뿐이기 때문에 위조례 제4조(업무) 제4호제5호의 창의장등을 → 창의장 및 의병으로 수정해야 한다. 조례도 법령이지만 수정하지 않으면 창의직인 내암 이외에 다른 봉안한 사람(의병) 및 이들을 선양 및 홍보하는 건불법이다. 25년간 창의사(임란 창의기념사업회)가 불법을 저질렀다고 비판해도 발언이 사라졌다. 1605년(선조 38) 임진왜亂, 때 공을 인정받아 선무하라 종공신 1등3 등에 징계된 자가 9023명이다. 1위 565명, 2위 3515명, 3위 4943명이다. 첸카와 대병면 창의사에게 봉안된 사람 중 선무원 종공 신장훈을 받은 자(11명)는 다음과 같다. 공동참혹(공조도판, 종2품) 정인헌 건립한 가남정(伽南亭)에는 정인함(鄭仁涵), 정인경(鄭仁卿), 정인기(鄭仁耆)鄭仁濬」을 모시고 있다. 종 9품) 정결(정청, 부: 정인기, 5정동숙: 정인헌), 고급제(급제, 1589년 문과 급제) 영출생) 2등, 고부정(부정, 종3품) 정(우정, 종 4품) 전제(전후, 14세(13대) 손자: 정두환) 정봉성, 1558생, 고령생, 1589년 문과급제), 참봉 시모종해(河宗海, 5촌 당주 : 하혼하개, 의남: 위종인홍송인갑 등 선무원종 공신녹훈자 11명을 제외하고 임란 때 공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과 단지 이름만으로도 나오는 사람이 42명이라는 것을 내가 확인했다. 실록, 난중잡록, 고대물록, 송암집, 조봉집, 봉한집, 송기양 등에서 방문했다.
그런데 특히 손약해학, 부 : 송인갑, 주국신, 서배, 허자대, 정옥, 정옥, 조인헌의 위패가 창의사가 아니면 반드시 봉안해야 한다. 송인가부의 아들 송약해(孫若虛海, )는 1592년(선조 25) 성주 수륜의 백운리 전투에서 아이 없이 아내만을 남기고 전사(戰死)했다. 아버지의 손갑이 사망하고 123일 후에 전사한 것이다. 성주성 전투 때 합천 출생의 교생(주생신,?1592, 처분 : 林承祚, 처조부 : 우천 임훈)은 왜적의 추격을 받았다. 鄭沇鄭 (정사 정, 1571 ) 1592년(조상 25) 5월 말 정인헌이 삼가현의 정문당(초사당)에서 초빙사(김성일, 김성일, )를 만날 때 하는 등 아버지 정인헌의 참모로 역할을 했다. 그 밖에 이승(이승, 성주기 군장·성주기군단, 3등)과 현풍출생 박성(朴惺), 현풍의 곽추(곽추, 곽재아제페), 고령 김은성(김구성, ), 송주출 함안모고크리 이계현), 박엽(박엽, , 5천다) 은숙 : 박사제), 박현(박병, , 6천현 : 박엽3, 1천천 8사직, 월 폐모정청 출석, 11세손: 노백헌 정재규, 정인헌 휘하에서 송주 9전 4, 고령생)도 봉안해야 한다. 또 정인헌의 지시로 합천군 가장 김준민과 중위장 정방준, 센산군도 개면 출생 등 정예한 궁수 500여명을 빌려 초 1차 진주성 싸움에 참가해 패했지만 , 공조복도, 8촌동생 : 스찬 권도)와 7정 아제권 세춘(권세춘, ?을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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